#1. 느린 아이(slow-to-warm-up)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에 비해 느린 기질을 가진 아이들은 생각하기에 좀 더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느린 아이" 역시 많은 부모님들을 상담실을 찾게 한다. 느린 아이들은 반응이 느리고 수줍음이 많으며 다소 사회성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특히 부모가 기질적으로 다혈질이거나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적극적인 부모라면 더욱 느린 기질의 자녀와 잦은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느린 아이들은 경험에 대한 습득과 표현의 시간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더디기 때문에 성격이 급한 부모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자주 다그치거나 나무라는 경우가 생긴다.
「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유치원에 가기 위해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고민이다. 앞에 엄마가 몇 벌의 옷을 준비해 주고 고르라고 했지만 무엇이 오늘 입고 가면 좋을지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엄마는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쁜 데다, 아이가 유치원에 늦을 것 같아 빨리 고르라고 재촉을 하지만 아이는 옷들 앞에서 멀뚱멀뚱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 결국 엄마는 짜증을 내며 아무 옷이나 골라 아이에게 입힌 후 유치원에 가도록 재촉하게 된다.」
앞선 포스팅에서 까다로운 아이와 유사한 장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까다로운 아이는 마음에 드는 옷, 완벽한 옷이 없기 때문에 고르지 못하고 짜증을 내지만, 느린 아이는 무슨 옷을 입을지 고르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똑같아 보이는 상황이지만, 이때 부모는 까다로운 아이에 대한 반응과 느린 아이에 대한 반응이 달라져야 한다.
느린 기질의 아이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때 매우 신중하며 깊이 생각하다 보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과업을 위해 정해진 제한 시간이 지나가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고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일쑤이다. 특히 아동기에 이러한 기질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험문제를 제한 시간에 다 풀지 못하거나, 수업 시간 내에 과제를 다 수행하지 못하고 시간을 넘기거나 하는 등의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는 일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부정적인 자기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그룹활동에서 뒤처지게 되면서 또래친구들로부터도 부정적인 시선을 경험하게 되어 또래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가끔 이러한 문제로 상담실에 방문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느리고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점들에 대해 답답해하며 이를 문제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다름'인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다만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신중하다 보니 좀 느릴 뿐인 것이지 그것이 심각한 문제행동인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느린 아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자기표현이 서투르다. 아이의 생각이나 느낌을 물으면, 느린 아이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한다. 또는 한참 동안 생각한 후에 아주 짧은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또래관계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생기기 쉽고, 대체로 교실 안에서 조용히 혼자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하는 아이로 비치게 된다.
느린 아이는 생각이 깊고 조용한 편이다 보니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경우가 많아,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 내면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혼자 상상 속에 빠지거나 그러다가 혼자 웃기도 하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다.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비교적 적고 수동적이다. 이러한 아동의 혼자만의 즐거운 세상을 누군가가 알아차려 주고 공감해 주면 매우 기뻐하지만, 실상 대부분의 느린 아이들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경험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느린 기질의 아이들은 까다로운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우울감과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느린 아이들은 느린 시간의 세상을 살지만 주변은 빠른 세상의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주변과 차이가 생기면서 그 안에서 상당한 불안과 위축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아이들이지만 세상은 아이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빨리 해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신념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느린 아이들은 이러한 자신의 부적응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이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별 문제없어 보이다가 별안간 중학교에 가서 문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 부모는 갑작스러운 아이의 변화에 당황하고 허둥대게 된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느린 아이들의 경우, 심리검사를 해보면, 아이가 보이는 심리상태와 부모가 지각하는 자녀의 심리상태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의 힘든 정서상황을 눈치채지 못하다 보니, 아이의 부적응 행동에 부모 역시 부적절하게 반응하게 된다.
#2. 느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
부모는 먼저 부모가 느끼기에 답답한 행동이나 느린 반응들이 기질에 의한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기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상당한 심리적 우울감일 경우일 수 있기 때문에 부모는 민감하게 관찰하고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만약 느린 기질로 인한 행동과 반응이라면, 부모는 이러한 자녀의 기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칫 아이에게 재촉하고 다그치게 된다면, 느린 아이들은 더욱더 위축되고 경직되어 오히려 더 반응이 느려지거나 멈춰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과업을 수행하는데 오래 걸려 어려움을 경험하는 자녀에게 부모는 재촉하기보다는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씩 속도를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양을 정확히 판단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조금씩 그 양을 늘려가면서 아이가 시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내 아이의 시간이 부모인 나보다 느리다는 점을 이해하고 조금씩 부모의 시간에 맞출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느림으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부적응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들에 충분히 공감해 주고,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점에 대해 이해시켜 줌으로써 아이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개념화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기만의 생각 속에 조용히 빠져 상상의 나래를 펴는 자녀라면, 부모는 아이를 현실세계로 이끌어 줘야 한다. 먼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와 충분히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들어줘야 한다. 아이의 생각 속에서 긍정적인 강점들을 발견해 주고, 아이가 그 점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좋은 신념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와의 소통을 통해 사람 간의 소통의 유익함과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랑 대화할 때 만약 다그침과 비난이 더 많다면, 느린 아이는 더더욱 주변과 소통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느린 아이들은 자기표현에 미숙하거나 잘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정서경험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내 아이가 느린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세심하게 자녀의 감정과 정서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좀 더 빨리 자녀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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